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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공부 기록하기/02. 기본개념

[자본주의의 간단한 역사]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는가?:자본주주의 간단한 역사(자본주의 여명: 1550~1820년)

by 행복한이천만장자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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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여명: 1550~1820년

 

자본주의의 탄생:슬로 모션으로

1) 1500~1820년사이 서유럽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여전히 0.14퍼센트에 지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면에서 1000~1500년 기간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2)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면방직과 제철 부분을 중심으로 성장이 가속화되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결과 150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영국과 네덜란드 각가 0.27퍼센트. 0.28퍼센트의 1인당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과학, 기술, 제도의 출현

1) 세상을 이해하는데 좀 더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화하면서 수학과 과학이 탄생하기에 적합한 토양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아랍 문화권과 아시아에서 개념드을 많이 빌려왔지만, 16~17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유럽 사람들도 자신들 나름의 혁신을 보태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페르마, 뉴턴, 라이프니츠 등 현대 과학과 수학의 아버지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지식이 체계화되면서 기술의 혁신을 개인에게 의존하던 경향이 줄어들고 이전도 쉬워져 새로운 기술 간 융합이 촉진되어 경제성장을 이어졌다.

 

2) 18세기 방직과 제철,화학을 비롯한 산업 분야에 기계화된 생산 체계를 가능하게 한 몇 가지 새로운 기술이 탄생했다. 연속 조립 라인은 19세기 초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이용해 애덤 스미스의 핀 공장에서처럼 분업이 좀 더 세밀하게 이루어졌다. 생산량 증가와 생산성 증가 사이에 선순환이 형성된 것임

 

3) 새 자본주의적 생산 현실에 맞춘 새로운 경제 제도도 도입되었다. 점점 널리 퍼지는 시장 거래를 더 수비게 하기 위해 은행이 진화를 했고, 개인의 부로 감당할수 없는 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하는 투자프로젝트들이 나옴에 따라 법인 또는 유한회사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주식 시장도 탄생함

 

식민지 확장의 시작

식민주의 큰상처를 남기다.

 


1820~1870년 : 산업 혁명

 

터보 엔진을 단 자본주의 : 산업 혁명의 시작

 1)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함 북미와 오세아니아 대륙 등이 뒤를 이었다. 이성장의 가속 정도가 너무도 극적이어서 1820년 이후 반세기를 우리는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평균 수명 17세, 주당 80시간 노동: 일부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1)반자본주의 운동의 방출

2)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신화 : 자본주의 성장사의 실체

3)보호주의의 선구자 영국

4)보호주의 챔피언 미국

5)자유무역, 자유롭지 않은 방법으로 확산되다


1870~1913년 : 결정적인 하이눈 시기

 

1) 자본주의 성장이 가속화되다:대량생산의 시작

2) 점점 거대해지는 생산규모와 위험 부담, 불안정선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제도 출현하다

3)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더 '자유주의'적 황금기

 


1914~1945년 : 파란의 시기

 

자본주의, 발 헛딛다 : 1차 대전, 그리고 자유주의적 황금기의 종말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은 자본주의의 한 시대가 끝났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1871년 파리 코믠 등 빈곤층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기감과 1872~1896년의 장기 침제(Long Depression)같은 경제적 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대전 발발 전까지 자본주의는 상승과 팽창만을 거듭하는 듯했다.

 1차 대전(1914~1918)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적으로 상업적 상호관계의 그물이 점점 더 촘촘해지면서 나라들 간의 관계도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서 사람들을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도 전쟁이 터진다는 것은 극도로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들 생각했었다.

 1차 대전의 발발은 어떻게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이눈 시기의 세계화가 시장의 힘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힘으로 진행된 탓에 주요 자본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언제라도 무력을 동반한 갈드이 되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화이였기 띠문이다. 

 

자본주의의 라이벌이 등장하다 :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의 탄생

1928년 당시 소련은 명백히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 이익 추구라는 동기 부여, 시장 등이 없이 돌아가는 경제 시스템 말이다.

 소력시 사회주의는 거대한 경제적 실험이었다. 그때까지 어떤 경제도 중앙에서 세운 계획에 따라 운영된 적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상세한 부분을 아주 모호하게 언급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소련은  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일이 닥치는 대로 임기응변식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카를 카우츠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마저 소련의 앞날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경제 시스템은 대기업과 대기업 카르텔에 의해 이미 고도의 계획 경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완전 계획 경제 시스템 바로 직전 단계까지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은 심지어 연방 내에서 좀더 개발이 된 유럽 지역조차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후진 경제로, 사회주의가 자연 발생적으로 태어날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소련의 초기 산업화는 큰 성공을 거두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성공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동부 전선 진군을 막아내면서 더욱 크게 주목 받았다. 1928년에서 1938년 사이에 1인당 소득은 연간 5퍼센트 비율로 증가했다. 당시 다른나라의 연간 성장률 1~2퍼센트와 비교하면 실로 눈부신 성장이었다.

 

자본주의, 우을정에 빠지다: 1929년 대공황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준 것은 사회주의 부상보다 대공황이엇다. 특히 1929년 월가의 붕괴로 시작된 악명 높은 대공황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미국에서는 더욱 그랬다. 1929년 이후 국제 무역이 무너지 주요 이유는 관세 인상이 아니라 핵심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이 균형 재정에 집착하면서 벌어진 국제적 수요의 급락이라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개혁이 시작되다: 선두에 선 미국과 스웨덴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이 상처와 함께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대한 거부감이 널리 퍼지고,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고개를 들었다.

 자본주의 개혁은 공황이 가장 심하고 오래 지속되었던 미국에서 제일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휘 아래 시도된 1933~1934년의 이른바 제 1차 뉴딜정책에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도록 했고, 예금 보험을 말녀해서 은행들이 파산해도 소액 예금주들이 보호 받도록 보장하는가 하면, 주식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따. 그뿐만 아니라 농업 신용 대출 제도를 확장 강화하고, 농산물 쵲처 가격 보장제를 도입했으며, 사회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상당한 개혁을 단행한 또 하나의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에서는 실업률을 25퍼센트까지 치솟게 한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팽배한 분위기에 힘입어 1932년 사회민주당의 정권을 잡았다. 소득세가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제는 소득세의 대명사가 된 나라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늦은 시작이었다. 소득세 수입은 1934년 실업 보험을 설립하고 노령 연금 액수를 높이는 등 복지 국가를 확장하는 한편, 농업 신용 대출을 확장하고 최저 가격을 보장하는 등 소규모 농장들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었다. 

 

자본주의, 주춤거리다 : 성장이 저조해지고 사회주의가 더 높은 성과를 낸다.

1914~1945년 기간의 혼란은 2차 대전의 발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고, 전쟁은 군인과 민간인들의 목숨 추천만을 앗아 갓따.

 


1945~1973년 : 자본주의의 황금기

자본주의, 성장&고용&안정 모든 면에서 좋은성과를 내다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오기전까지의 기간을 흔히들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황금기에 이루어 낸 것은 높은성장률만이 아니었다. 노동자 계층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실업은 서유럽, 일본,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 국가들의 경제는 생산량, 가격, 금융 등 여러면에서도 무척 안정적이었다. 이전 시기에 비해 생산량의 부침이 훨씩 적었는데, 이는 경제가 하향 곡선을 그릴 때는 정부 지출을 늘리고 상향 곡선을 그릴 때는 지출을 줄이는 방식인 케인스식 재정 정책의 공이 컸다. 그에 더해 금융 부문의 안정성도 괸장히 높았다. 황금기 동안 은행 위기를 겪은 나라는 거의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000년대 중반 몇 년을 제외하면 1975년 이후에는 매년 예외 없이 5~35퍼센트의 나라들이 은행 위기를 겪었다. 

 

황금기를 이루어 낸 요인들

2차 대전이 끝난 후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를 기다리는 기술이 선례없이 쌓여 있어서 황금기의 경제 성장에 추진제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황금기에는 또 경제 발전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 몇가지 주목할만한 변화가 국제 경제 체제에 일어났다.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회동한 2차 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주도할 두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브레튼우즈 기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두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아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다.

 


1973~1979년 : 과도기

황금기는 1971년 미국이 달러-금의 태환을 중지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공황을 겪으며 금 본위제가 거시적 경제 운용의 융통성을 방해한다는 인식에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과거의 금 본위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통화체제는 여전히 궁극적으로 금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다른 주요 화페의 환율이 모두 미국 달러화와 고정되어 있었고 달러화는 금과 어느  때라도 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금1온스당 35달러)

 1971년 미국이 달러화에 대한 금 태환을 폐기하자, 그 후 1~2년 사이에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화폐를 달러화에 고정환율로 연동하던 관행을 폐기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불안정해졌다. 시장 분위기에 따라 화폐 가치가 부침을 거듭하고,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락하는 동안 차익을 노리고 투자하는 호나투기의 위험에 점점 크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종말을 고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는 높은 물가 상승률과 함께 영국, 미국과 같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부들이 들어서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황금기에 진정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혼합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어때를 완전한 실패의 시대를 묘사한다.

 


1980년~현재 : 신자유주의의 흥망

철의여인:마거릿 대처와 영국 전후 타협 체제의 종말

국영기업의 민영화

로널드 레이건과 미국 경제의 리메이크

낙수효과이론

 

제3세계 부채 위기와 제 3세계 산업 혁명의 종말

당시 의장 폴볼커의 고이자율 정책의 여파를 가장 길게 감수해야 했던 곳은 미국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이였다.

 

벽이 무너져 내리다: 사회주의의몰락

하나의 세상을 향하여,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 세계화와 새 경제 질서

종말의 시작:아시아 금융 위기

헛된기대: 닷컴 붐에서 '대안정'까지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케인스주의의 봄과 자유 시장주주의 맹렬한 귀환

그들이 취한 거시 경제 정책은 막대한 예산 적자를 낸다는 의미에서 케인스식었다.

양적완화 : 중앙은행이 돈을 새로 찍어서 주로 국채를 매수하는 방법으로 시중에 돈을 푸는 것을 말함

긴축

결과 : 잃어버린 10년?

내가 조금, 너무 늦게?:개혁의 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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